그림 그리는 사람 – 다니구치 지로 마지막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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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구치 지로, 브누아 페터스/김희경 옮김

분야: 만화, 만화비평/대담집

200쪽 / 185mm × 260mm / 올컬러 / 정가 20,000원

반양장 / 발행일 2020년 2월 11일

ISBN | 979–11–86921–83-8 03650

 

행복했던 만화가의 삶 이야기, 최상의 만화 수업 – 3년 전 우리 곁을 떠난 다니구치 지로를 추모하며

2017년 2월 11일 『고독한 미식가』의 작가 지로 다니구치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전 인문학자 브누아 페터스와 오랜 기간 대담한 내용을 풍부한 이미지 자료와 함께 작고 3주기에 맞춰 책으로 출간했다. 동양 만화가 최초로 앙굴렘 만화 페스티발에서 두 차례나 수상한 다니구치는 이 책에서 40여 년간 발표한 작품들의 창작 과정을 하나하나 밝히면서 발상과 기획의 배경, 화면 구성, 대사와 지문 배치, 인물 설정과 배경 처리, 심지어 의성어 그래픽 삽입 방식이나 협력자들과 함께 일하는 방식 등 지극히 세부적인 내용까지 상세히 밝혀 이 책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실제적이고 효과적이고 고급스러운 만화 창작 강의를 담은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만화를 사랑하고, 만화가를 지향하고,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그가 삶에서 찾았던 작은 행복에 대한 성찰과 창작에 대한 열정은 독자들에게 아주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동서양 만화 세계를 이은 당대 최고의 만화가

2003년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지로 다니구치가 『열네 살』로 최우수 시나리오 상을 받았을 때 전 세계 만화인은 깜짝 놀랐다. 당시 그는 일본에서도 별로 유명한 작가가 아니었고, 서양 만화계에서는 애초에 일본 만화를 무시하고 불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니구치는 2년 뒤에 앙굴렘에서 『신들의 봉우리』로 또다시 최우수 작화상을 받았고 세계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작품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됐으며 대표작 『열네 살』은 영화로 제작됐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동양 만화’를 서양 만화계에서 제대로 인정받게 한 작가이며 서양 그래픽노블의 특징과 기법을 동양 만화 세계에 녹여낸 작가였다. 그렇게 그는 동서양 만화가 실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공적으로 교류하게 한 살아 있는 전범이었다.

이 책은 자크 데리다, 폴 발레리, 에르제 등에 관해 저술한 인문학자이며 그래픽노블 시나리오 작가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브누아 페터스가 장기간 지로 다니구치를 인터뷰한 내용을 풍부한 사진 자료, 발췌한 작품 사진 등과 함께 편집해 출간한 대담집이다. 시골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다가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도쿄로 올라와 유명한 만화가의 조수로 경력을 시작한 다니구치. 만화가 지망생 그의 삶이 이후 어떻게 펼쳐졌는지, 어떻게 세계적인 작가가 됐는지, 평생 만화밖에 몰랐던 그의 열정은 어떤 신념으로 불타올랐는지 독자들에게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는 듯한 흥분을 안겨준다.

만화 창작의 실제와 설명

서점에서 만화 관련 이론서나 평론집은 물론이고 만화 창작에 관련된 실용서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전자 장비를 이용하는 웹툰이 대세인 오늘날 연필과 펜, 붓으로 인물과 배경을 그리고, 칸을 나누고 채우던 전통적인 만화 창작 방식을 포기하거나 경시하는 창작자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웹툰이 때로 ‘천만 관객’ 영화로 탄생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제9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만화는 영화만큼이나 정교하고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젊은 시절부터 탐정만화, 성인만화, 동물만화, 권투만화, 음식만화, 등산만화, 괴물만화 등 온갖 장르의 대중적인 작품은 물론이고 역사만화, 문학만화, 철학만화 같은 성찰적인 작품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한 다니구치는 대담자 페터스의 질문에 따라 자기 작품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예리하게 분석하며 그 작법까지 상세히 설명한다.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다양한 시각 자료와 함께 다니구치의 거의 모든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작품을 기획할 때 핵심 주제를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서사 구조를 어떻게 구성하고, 시나리오를 화면에 옮기는 과정에 어떤 원칙을 세우는지, 어떻게 인물의 감정 표현을 가시화하고, 배경에 지극히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이며, 말풍선과 지문은 어떤 원칙에 따라 배치하고, 대사가 전혀 없는 만화에서 감정과 메시지를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 마치 친절한 선배 만화가가 후배에게 자기만의 비밀을 공개하듯 깨알 정보들을 상세히 들려준다는 데 있다. 게다가 만화를 읽는 기쁨을 주었던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에서 발췌한 풍부한 작품 이미지와 그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 성공한 작가가 된 삶의 여러 국면을 보여주는 빛바랜 가족사진부터 유럽 만화가들과 함께한 사진까지 그의 인생을 담은 사진들은 독자에게 흔치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만화 분야에서 일하거나 만화가를 꿈꾸는 창작자는 물론 만화를 즐기는 일반인에게도 눈이 번쩍 띄는 흥미로운 내용을 가득 담고 있다.

특히 부록으로 삽입된 80여 명 동서양 대표 만화가에 대한 주석은 만화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겐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예술가의 소명과 행복

이 대담집을 읽는 동안, 그리고 읽고 나서도 감흥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가 만화가로 살아가면서 삶의 여러 국면에서 보여준 삶에 대한 겸손하고 진솔한 자세가 깊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인 듯하다. 그가 당대 유명 만화가들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힘겹게 일하던 시절 만화에 미쳐 만화만을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만화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았을 때나 새로운 대작에 도전했을 때, 심지어 야심차게 준비했던 작품이 실패했거나 협력자들과 갈등을 빚게 됐을 때에도 그가 품었던 신념과 각오를 되새기는 장면은 만화와 삶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에게는 삶에서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삶을 천천히 음미하며 살아가는 자세, 많은 것을 발견하고, 새롭게 도전하고, 늘 창작하는 열정에 불타는 일상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대담자 브누아 페터스가 그에게 ‘지니 같은 요정이 크든 작든 운명을 바꿀 수 있게 해주겠다면 무엇을 바꿔달라고 말하고 싶으냐’고 묻자 그는 담담히 대답한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으니까요. (…) 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런 즐거움 덕분에 제가 계속해서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엄청난 성공을 원하지 않습니다. 전 이미 제가 희망할 수 있었던 모든 걸 넘어서 인정받았습니다. 겸손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 성공에 집착하지 않고 되도록 자유롭게 작업하고 싶습니다. 제겐 그게 더 중요합니다. 어쩌면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성공하겠다는 욕심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절 자극하는 것은 더 큰 성공을 거두겠다는 야망이 아니라, 제게 정말 중요한 만화를 그리고 이야기하고 싶은 소망입니다.”

목차

  1. 서문……………..03
  2. 수습기……………..11
  3. 클로로포름……………..9
  4. 전문 만화가……………..47
  5. 작가의 길……………..71
  6. 일본 만화, 유럽 만화……………..105
  7. 다니구치 스타일……………..137
  8.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161
  9. 작품 및 주석……………..187

저자 소개

다니구치 지로

다니구치 지로(谷口ジロ)는 1947년 돗토리(鳥取)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0년 만화가로 데뷔했고, 1991년부터 『산책 步くひと』, 『아버지 父の曆』 등 여러 작품을 발표했고, 쿠스미 마사유키(久住昌之)와 공동 작업한 『고독한 미식가 孤獨のグルメ』와 『우연한 산보 散步もの』, 가와카미 히로미(川上 弘美)의 소설을 각색한 『선생님의 가방 センセイの鞄』 등을 발표했다. 2003년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Le Festival d’Angoulême)에서 최우수 시나리오 알프아르(Alph’Art) 상을 수상한 『열네 살 遙かな町へ』 1권은 만화 전문서점 카날 베데(Canal BD) 상도 수상했다. 『열네 살』은 2010년 프랑스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던 그는 2017년 2월 갑작스레 타계했다.

브누아 페터스

브누아 페터스(Benoît Peeters)는1956년 8월 2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르본(파리 1대학)에서 철학학위를 받은 뒤 고등실천학교에서 롤랑 바르트의 지도로 기호학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소설 두 권을 출간한 후 에세이, 전기, 삽화를 곁들인 이야기, 사진소설,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연극,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에르제(Hergé) 전문가인 그는 『에르제의 세계 Le Monde d’Hergé』, 『에르제, 탱탱의 아들 Hergé, fils de Tintin』, 『탱탱 읽기, 매력적인 보석 Lire Tiintin : les Bijoux ravis』 등 에르제에 관한 획기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만화, 스토리보드, 공동으로 글쓰기를 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또한 히치콕(Hitchcock), 폴 발레리(Paul Valéry),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에 관한 책도 저술했다. 브누아 페터스는 프랑수아 스퀴텐(François Schuiten) 외에도 알랭 고팽(Alain Goffin), 안 발튀스(Anne Baltus), 프레데릭 부알레(Frédéric Boilet) 등과 같은 만화가들, 사진가 마리 프랑수아즈 플리사르(Marie-Françoise Plissart) 그리고 영화감독 라울 루이즈(Raoul Ruiz)와 공동 작업을 했다. 만화 창작과 관련해서는 2013년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미디어페스티벌에서 만화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 번역된 출간물로는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가 있다.

역자 소개 : 김희경

옮긴이 김희경은 성심여자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했으며 프랑스 피카르디 대학에서 불어불문학 석사 및 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불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 『뚱뚱해도 괜찮아!』 『어린이를 위한 갈리마르 생태환경교실』 『유치원에 처음 가는 날』 『미용사 레옹의 행복』 『소설가 줄리엣의 사랑』 『넌 누구니?』 『처음 그날부터』 『나는 나의 꿈이다』 『명작 스캔들』 『나의 첫 프랑스 자수』 『헤르메스 이야기: 100편의 연속극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테세우스 이야기: 100편의 연속극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등이 있다.

본문 중에서

다니구치의 예술은 정의하기 어렵다. 그는 신중함과 효율성이라는, 서로 길항하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컷과 컷 사이, 침묵과 후퇴, 삶의 여백, 잃어버렸거나 잠시 중단된 순간 사이에 중요한 것들이 숨어 있다. 대부분 일본 만화에서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는 배경도 그의 작품에서는 매우 사실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배경은 대사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과장하자면 세월이 흐르면서 다니구치는 장인에서 창작자가 됐다. (…) 다니구치는 서사에서 그림까지 만화 작가로서의 역량을 완전히 기르고 나서야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그의 작품이 외국에서 번역 출간되면서 진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다니구치의 작품은 연극과 영화로 각색되었고, 이제는 여러 나라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 같은 국제적 재평가는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브누아 페터스의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 중에서 8쪽.

제 작품에서 영화의 영향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강한 인상을 남긴 영화의 이미지들은 제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 컷을 분할하는 방식, 시간과 공간을 처리하는 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덕분에 만화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전 만화의 언어와 가능성을 사랑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이후 만화는 같은 화면에서 각 컷의 배열과 크기,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발휘하는 효과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효과는 순간성과 지속성을 연출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전 여전히 이런 만화의 특성이 좋습니다. 84쪽

(『산책』을 작업할 때) 첫 장부터 느끼진 못했지만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건 이제까지 만화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하지만 이 작품이 『모닝』에 실렸을 때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조금 실망했지만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전 이것이 과연 제가 가야 할 길인지 의심하고 망설였습니다. 저만의 만족을 찾으려는 것은 아닌가 싶었고, 독자들은 만화에서 고전적인 의미의 서사를 기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시도였지만, 그런 점들이 제가 계속해서 『산책』을 작업하는 데 장해가 되진 않았습니다. (…) 놀랍게도 저는 실제로 산책하면서 점점 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방향으로 더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88-89쪽

재밌게도 『고독한 미식가』는 일본 시장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 중 하나인데, 처음에 전 이 기획을 거부했습니다. (…) 후소샤 출판사 책임자는 제가 이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글과 그림이 명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만화를 원했습니다. 뭔가 조화롭지 않은 걸 찾고 있었던 거죠. 전 그의 말을 듣고 대체 어떻게 부조화하게 그림을 그려야 할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결국 그의 제안을 승낙하고 말았습니다. 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음식 관련 만화이잖습니까? 음식을 그리기도 어려운데 게다가 식욕을 돋우게 그리기는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독자들에게 미각을 전달하려면 주인공이 매력적이어야 하고, 음식 맛은 그의 느낌을 통해 전달해야 했습니다. 주인공이 먹은 음식 맛을 스스로 전달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 그냥 음식 그림만 그려놓으면 아무 맛도 없을 테니까요. 전 주인공의 표현, 동작, 주변 환경 등에 주의해 그리면서 각각의 일화에 유효한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저 클로즈업해서 음식만 그려놓으면 감흥이 없으니까요. 90-91쪽

이 만화(『아버지』)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서야 비로소 여러 가지를 이해하지만, 전 자식이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온전히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가 품고 있던 감정을 직접 전달하는 편이 낫다는 걸 독자들이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 자신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실을 이 만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뒤늦게 후회하지 않도록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아직 가능할 때 부모와 그걸 공유하고, 원한을 품고 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품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들이 마음속 깊이 이런 행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과 이 행복을 재발견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나이 든 사람조차도 대부분 자기 부모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부모를 이해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우리는 너무 늦게 알게 됩니다. 95쪽

순수문학 작품을 쓰듯이 시나리오를 상세하게 쓰는 건 지루합니다. 전 결말에 대한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한 챕터씩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그 결말에 도달할 때까지 가장 좋은 길을 찾는 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작업 방식은 퍼즐 맞추기와 흡사합니다. 미리 설계한 코스를 따라가며 이야기를 전개하기보다 목표를 수정하면서 조금씩 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도중에 갖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고, 새로운 요소를 첨가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점점 더 풍성해지죠. 이미 모든 게 결정된 상태로 출발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작업하면서 많은 걸 발견하게 되니까요. 151

되도록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사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대사는 장면을 설명하지 말아야 하고, 감정을 완전히 표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그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가장 까다로운 게 양쪽의 대사를 연결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 중요하지만 쉽지 않은 또 다른 과제는 화면에 등장하는 첫 지문과 첫 대사입니다. 몇 개의 단어로 작품 전체의 속도와 분위기를 제시해야 하니까요. (대사를 세분해 두세 개 말풍선으로 나누는 것은) 대화가 숨을 쉬게 하는 방식입니다. 독자들이 침묵, 주저, 혹은 장면을 연결하는 대사의 속도 같은 걸 느끼게 하려는 겁니다. 지문과 대사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최대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헤서 독서의 흐름이 단절되거나 충돌하지 않게 하려고 했죠. 151쪽

일본에는 주인공 캐릭터가 성공하면 만화도 성공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만화 시리즈 기본 원칙은 항상 등장하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만들어내야 하고, 이것이 작품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 늘 이 원칙을 거부했습니다. 전 작품 도입부에서 주인공 없이 경치와 배경만 보이는 장면을 그리기도 합니다. 가령 『산책』에서 배경은 여러 장면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정말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단 한 명의 인물보다는 여러 인물을 둘러싼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제 작품의 그런 점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제 스타일입니다. 이런 선택 덕분에 제 만화의 표현 영역이 확장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제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156쪽

작품에서 배경은 인물과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주목하도록 배경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주제를 다룰 때 사진에서 아이디어를 얻으면 더 생생한 효과를 내고, 독자들이 몰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죠. 물론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 되고, 아주 상세히 묘사해야 하는 것과 덜 상세히 묘사해도 되는 것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전 배경과 사물의 정확한 묘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나칠 때도 있는 것 같긴 한데…. 균형을 유지한다는 건 언제나 예민한 문제죠. 160쪽

전 만화를 통해서 과학 기술의 진보가 공헌하는 부분이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덜 필요하고, 항상 앞서 나가야 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꾸준히 알리고 싶습니다. 제 태도가 과거 지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가 느끼기엔 이렇게 비대해진 물질적 편리성이 없던 시대가 정서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더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과거 지향적인 사고가 어쩌면 미래를 위한 진정한 제안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갔을 때 시골을 향해 파리를 벗어나자마자 평온함을 느끼며 긴장을 풀 수 있었습니다. 저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각할 것이 분명한 이런 감정에 근본적인 뭔가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산책』의 주인공처럼 이제 더는 달릴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이 만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지만, 이런 메시지가 독자들에게 잘 전달됐는지 모르겠습니다. 174쪽

역사관이 저와 다른 독자들이 감동하게 하려면 가상의 이야기로 주목을 끌 만한 점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만화의 장점이지만, 보는 사람을 지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제와 서사의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따라서 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좋은 이야기는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상황을 읽고 발견하고 이해하게 유도할 수 있습니다. 만화는 그런 일을 하는 데 특히 적합한 장르입니다. 물론 이런 주제는 문학에서도 다룰 수 있지만, 만화는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게 만화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그 점을 이용하려고 노력합니다. 175-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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