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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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지음
분야: 러시아 문학/비교 문학, 역사/한국문화
448쪽 / 152 × 220mm
정가 25,000원
발행일 2017년 10월 31일
ISBN | 979–11–86921–50-0 93890

근대 러시아 문학을 통해 근대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엿보다

20세기 초 러시아 문학이 한국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연구해온 학자가 방대한 기록을 참고하고 분석과 성찰을 거듭하여 완성한 책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러시아 문학은 문학 이상의 현상이었다. 궁핍했던 시대를 비춘 거울이자 대리 발언대로서 다른 어떤 외국 문학보다도 깊은 반향을 일으킨 휴머니즘 교과서였고, 근대 지식과 감성과 문화를 유입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 책은 1896년 조선왕조 사절단의 첫 러시아 여행에서부터 1946년 이태준의 첫 소련 여행에 이르는 50년간 러시아 문학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번역되고 읽혔는지, 또 러시아/소비에트 러시아의 표상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펴본다. 주로 일본을 통해 유입되었던 러시아 문학이 식민지라는 특수 상황에 놓여 있던 한국에서 계몽, 지식인과 민중, 낭만성, 방랑, 여성해방, 이념 등 주요 키워드의 배경 텍스트가 되었음은 방대한 분량의 1차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분석되는 사실이다. 러시아 문학의 독법과 수용사가 곧 20세기 초 한국의 사회문화사를 형성했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주장인데,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홉, 푸슈킨, 투르게네프, 고르키 등 러시아 작가들과 그들을 토대로 당대의 문학을 확립한 ‘문화번역자들’(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염상섭, 이효석, 김기림, 이태준, 김기진, 백석, 나혜석, 백신애, 오장환을 위시한 다수의 문필가)의 비교가 그 주장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

한국인에게 러시아 문학은 어떤 의미인가

근대 한국이 상상하고 체험하여 기록한 러시아는 분단 이후 정치 상황에서 그 이미지가 이념적으로 고착된 러시아와 성격이 전혀 달랐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오늘날 러시아의 이미지가 춥고, 강하고, 무섭고, 투박하고, 낯설고, 부정적이라면, 근대 러시아는 낭만적 동경과 향수를 환기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왔고, 그 중심에 문학이 있었다. 최소한 일제 말 반공·반소 이념이 등장하기까지, 그리고 실제로는 그 후에도, 러시아는 갈 곳 없는 조선인을 위한 ‘대안’의 고향과도 같았으며, 자본주의 제국들과는 엄연히 다른 자유와 방랑의 제3세계였다. 그렇게 근대 조선에서 ‘러시안 드림’은 실재하는 꿈이었고, 애초 그 꿈이 싹튼 토양이 바로 러시아 문학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다시 조선 작가·지식인의 글을 통해 현실로 옮겨지곤 했다. 예컨대 “눈 덮인 시베리아의 인적 없는 삼림 지대로 한정 없이 헤매다가 기운 진하는 곳에서 이 모습을 마치고 싶소”(이광수, 『유정』)와 같은 글이 자연스레 유통되는 감성과 사유의 장이 당시에 확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문학을 통해 형성된 선험적 공간이었고, 개념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친숙했기에 마치 떠나온 고향처럼 그리워할 수 있었다. 바로 그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동경을 넘어 ‘향수’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러시아가 비록 동서냉전 상황에서 적대 세력으로 규정되고 부정적 이미지가 확대되었지만, 이와 전혀 달리 한국인이 러시아에 관해 품고 있는 막연하면서도 확고한 인상, 즉 러시아 문학이 위대하다거나, 러시아 민족성이 한국의 민족성과 비슷하다거나, 러시아 예술이 다른 어떤 서구 예술보다도 인간적이고 감동적으로 와 닿는다고 느끼는 집단적 인식과 무의식의 근원을 예리하고도 심도 있게 밝히고 있다.

러시아 문학과 한국 문학의 상관관계를 밝힌 진정한 비교문학 연구서

러시아의 근대 문학은 다른 어느 나라 문학보다도 우리 근대 문학기에 폭넓게 반영되었지만, 정작 양국 문학의 관계를 조명한 본격적인 저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교문학 차원의 연구가 있긴 해도 텍스트 번역 상태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는 단순 비교와 영향 관계 서술이거나 사조와 사상 수용의 역사를 개괄하는 정도이다. 최근 국문학 분야에서 이 주제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논문이 나오고 있지만,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사에 대한 이해가 때로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연구를 특정 현상이나 작가, 작품 분석에 한정한 나머지 장기적 관점에서 전체 맥락을 개괄하는 시야가 좁다는 문제가 있다.
이 책은 특정한 작가나 작품, 매체에 집중하지도 않고, 텍스트 번역사를 주요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근대 식민지 현실에서 이념이 소용돌이치던 한국의 사회문화사를 러시아 문학의 프리즘을 통해 투시한다는 목표로 더 큰 맥락의 일관성 있는 시대사를 서술했다. 그런 점에서 소수 연구자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도 흥미를 느낄 대단히 흥미롭고 다양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이 책은 1차 자료집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열 개의 큰 주제를 통해 근대사의 다양한 키워드(제국, 유토피아, 신여성, 연애, 가난, 방랑, 이념 등)와 연관된 러시아물 텍스트(번역, 에세이, 보도기사, 문학작품, 문화현상)가 수집, 전시되어 있다. 이 책은 직접 발로 뛰어 쓴 충실한 작업의 결과물이고, 그만큼 후속 연구자들을 위한 기초 참고서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장에서 말하는 주요 주제

1. 러시아라는 이름의 서양: 1896년 조선왕조사절단의 러시아 여행기록인 『해천추범』과 1854년 러시아 원정대의 조선 경유 기록(『전함 팔라다』 부분)을 병치해 읽으면서 19세기말 조선의 러시아 인식과 제국 러시아의 조선 인식을 확인한다. 조선 최초의 러시아 여행기와 러시아 최초의 조선 여행기 비교는 각국이 변별적인 세계관과 목적의식에 따라 상대를 상상하고 일반화한 배경을 드러내며, 근대기를 관통하는 한-러 관계 논의의 기초를 마련한다. 러시아는 조선에 ‘대안’으로서의 서양이었으며, 계몽과 발전의 모델이자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2. 시베리아의 향수: 일제강점기 조선인 인식에서 시베리아는 유형과 고통의 동토가 아니라 자유와 구원의 유토피아 같은 공간이었다. ‘낙토 시베리아’라는 아이러니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선전한 신흥 개척지의 의미 이전에 갈 곳 잃은 조선의 방랑자들에게 제시된 정신적·정서적인 대안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시베리아는 대륙으로 통하는 길목이며, 접근이 가장 용이한 서양 방랑의 출구였다. 시베리아는 또한 독립운동의 무대이자 사회주의 혁명의 실험 무대였으며, 근대 지식인들이 애독한 러시아 문학의 무대이기도 했다. 이 장에서는 ‘낭만의 시대색’에 물든 식민지 지식인들이 시베리아를 ‘향수’하면서 남긴 실제와 문학적 방랑의 기록을 분석했다.

3. 삶의 텍스트, 소설의 텍스트: ‘조선의 톨스토이’라고 불렀던 이광수의 시베리아 체험과 톨스토이 독법을 살폈다. 이광수는 톨스토이를 애독했을 뿐 아니라, 톨스토이처럼 살고 쓰고자 했다. 톨스토이를 읽고 모방(번역)할 때 이광수가 다분히 선택적이었던 것은 이광수 개인은 물론 그의 시대가 특정한 방향의 톨스토이, 그리고 사회예술론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이 수용되는 과정의 시대사, 카추샤 현상, 『부활』과 『유정』의 비교 등이 이 장의 주된 내용이다.

4. 일본 유학생과 러시아 문학: 조선에서 1세대 노문학도들이 배출되는 과정과 그들 초기 노문학도의 활동을 면밀히 추적했다. 제1호 노문학도인 순성 진학문을 위시해 와세다 대학과 동경 외국어학교 출신인 이선근, 함대훈 등 노문학도들의 번역, 창작, 언론 활동이 주요 대목이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근대 지식인들이 모두 어느 정도 노문학도로서의 역할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근대기는 러시아 문학에 대한 열기가 더없이 높았던 시기이며, 지식인들이 전공 분야와 상관없이 러시아 문학의 수용과 확산에 참여했던 시대로 당시 러시아 문학에는 외국 문학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5. 톨스토이냐 도스토옙스키냐: 러시아 문학의 두 거장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비교는 문학뿐 아니라 역사와 사상사에 중요한 논쟁거리를 제공해왔다. 근대 조선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가 수용된 과정 역시 문학, 문화, 사회사의 면면을 대변한다. 1920년에 나온 김동인의 예술론(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비교)은 문학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의이며,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대립이기 이전에 김동인 자신과 이광수의 대립으로 해석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적 작가로서 염상섭에 관한 논의도 전개된다.

6. 거지와 백수: 근대기를 통해 거듭 번역, 발표되었던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거지」와 「검은 손의 노동자와 흰 손」을 중심으로 ‘28만 경성 인구 중 20만이 거지’에 육박하던 가난한 식민시대의 계층 문제에 집중한다. 가난과 민중을 소재로 한 투르게네프 산문시 번역은 빈궁 문학의 일대 파장에 일조했음은 물론, 거지와 백수라는 두 아이콘을 통해 궁핍한 시대의 민중과 지식인의 역학 관계를 생생히 기록했다. 그런 의미에서 투르게네프 번역은 사회현실에 대한 시대적 인식과 대응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는 문화사회학적 사료로서 의의가 있다.

7. 신여성 시대의 러시아 문학: 자유연애, 자유결혼, 성해방 등 신여성 시대에 번역되고 읽힌 러시아 문학의 의미와 기능은 무엇일까? 『부활』의 카추샤가 낭만적 연애의 희생양이라고 한다면, 콜론타이의 게니아는 연애의 해방과 성의 해방이라는 극단에서 당대의 여성 담론을 지배했다. 동시에 푸슈킨의 타티아나, 투르게네프의 엘레나, 체홉의 올렌카는 남성 독자·필자에게 익숙하고도 편리한 ‘양처’의 모델을 제공했다. 이 장에서는 신여성 시대의 여러 쟁점은 물론, 함대훈, 김억, 이태준, 변영로, 이효석 등이 러시아문학을 통해 선택하고 제시한 신여성상을 확인한다.

8. 나타샤, 소냐: 마리아, 에스터, 앨리스 등의 서양 이름이 문명의 표식이었다면, 러시아 이름은 낭만의 표식이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나타샤’이고, 불멸의 백석 시를 통해 ‘나타샤’라는 기표는 가장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이상향-백색의 기의를 획득한다. ‘소냐’ 역시 많은 남성 지식인에게 사랑받은 여주인공의 이름인데, 백석의 나타샤와 달리, 가엾이 희생되는 누이(즉 ‘순이’같은)의 운명이 대변된 이데올로기적 대명사로서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시대를 대변하는 시적 기표로서 두 이름의 의미를 상세히 분석했다.

9. 실낙원인가 복낙원인가: 이 장에서는 1926~40년 함경북도 경성의 주을 온천 지역에 있었던 백계 러시아인 마을 노비나에 관한 내용을 소개했다. 볼셰비키 혁명 후 온 가족을 이끌고 이주해온 백계 러시아인 일가의 영지 노비나는 상해나 하르빈, 신경 등의 ‘룸펜로인’ 망명 사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자치 공동체였다. 백계 러시아인들에게는 ‘복낙원’과도 같았던 이 동화적 세계는, 그러나 나라 잃은 조선인에게는 실낙원의 예증이었고, 그곳에서 김기림과 이효석 같은 모더니스트들은 자신의 애수와 향수를 대리 경험하기도 했다.

10. 이태준의 붉은 광장: 소설가 이태준의 『소련기행』을 중심으로 조선의 문인들이 구성한 해방기 소련 담론의 공통 주제들을 짚어보았다. 이태준을 위시한 친소 계열 문인들의 여행 기록은 독립 조선의 미래를 향한 개념의 투시도이자 관념의 청사진이었다. 이들 기록이 보여주는 소련 여행의 맥락과 의의는 앙드레 지드의 소련여행, 반소-반공 성격의 소련 체험기, 그리고 1896년 조선왕조 사절단이 가록한 첫 러시아 여행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명료히 드러난다.

목차

머리말 _ 우리 안의 러시아 13
서문

I 러시아라는 이름의 서양: 『해천추범』과 『전함 팔라다』
1. 1896년, 조선의 첫 러시아 여행 43 | 2. 1854년, 러시아 원정대의 첫 조선 탐사
3. 비교되는 러시아

II 시베리아의 향수: 러시아 방랑과 낭만의 시대색
1. 개념으로서의 시베리아 | 2. 러시안 드림을 찾아서 | 3. 시베리아 방랑의 로맨티시즘 | 4. 낙토의 표상 시베리아 | 5. 시베리아 여행 담론과 이념

III 삶의 텍스트, 소설의 텍스트: 이광수와 톨스토이
1. 이광수가 읽는 톨스토이 | 2. 이광수 시대의 『부활』
3. 이광수가 쓰는 톨스토이

IV 일본 유학생과 러시아 문학: 조선의 1세대 노문학도
1. 근대 일본의 러시아어 교육장 | 2. 동경 외국어학교의 조선인 유학생 노문학도
3. 와세다의 유학생 노문학도 | 4. 함대훈의 경우 | 5. 위대한 문학의 시대

V 톨스토이냐 도스토옙스키냐: 1920년대 독법과 수용
1. 논쟁의 배경 | 2. 사상이냐 예술이냐: 김동인의 비교론
3. 도스토옙스키적 작가의 문제 | 4. 1930년대와 그 이후

VI 거지와 백수: 투르게네프 번역의 문화사회학
1. 가난의 시대와 문학 | 2. 가난에 내미는 빈손 | 3. 백수의 탄생

VII 신여성 시대의 러시아 문학: 카추샤에서 올렌카까지
1. 연애의 발견: 카추샤와 콜론타이 | 2. 정조와 내조: 타티아나와 엘레나
3. 사랑스러운 여자 올렌카

VIII 나타샤, 소냐: 여성의 이름을 부르다
1.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 2. 소냐와 순이

IX 실낙원인가 복낙원인가: 주을 온천의 백계 러시아인 마을
1. 얀콥스키의 복낙원 ‘노비나’ | 2. 김기림의 실낙원 ‘노비나’
3. 백색 위의 백색: 이효석의 주을과 하르빈

X 이태준의 붉은 광장: 해방기 소련 여행의 지형학
1. 해방기의 소비에트 러시아 열풍 | 2. 붉은 광장의 미학 |
3. 시베리아 유토피아니즘 | 4. 소련인의 웃음: 앙드레 지드와 이태준 | 5. 맺는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지은이 김진영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 Mass.) 러시아어문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슬라브어문학과에서 푸슈킨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푸슈킨: 러시아 낭만주의를 읽는 열 가지 방법』(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 번역서로 『예브게니 오네긴』(푸슈킨), 『코레야, 1903년 가을: 세로셰프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 『땅위의 돌들』(러시아현대시선집), Так мало времени для любви(정현종 러시아어 번역시선집) 등이 있다. 푸슈킨 단행본은 2016년 러시아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Пушкин: Десять очерков о русском романтизме, Ст. Петербург, Петрополи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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